[전문가 칼럼] 한국의전협동조합 류재승 대표, 삶과 죽음은 평행선

포스트21뉴스 승인 2021.08.31 16:05 의견 0
한국의전협동조합 류재승 대표

삶이란 죽음에 반대편, 죽음은 삶에 반대편에 서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반대편에 있지만 출발점이면서 종착역. 종착역이면서 출발점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은 함께하는 동반자다. 삶과 죽음은 현실속에 공존하며 서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상극된 관계에 있다.

사람은 보는 것만을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100세 인생이라 하지만 삶이란 것이 100년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살다보면 후회를 하지만 지나간 시간은 돌아 오지 않는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양면과 같은 것이다.

지혜는 역사를 통하여 얻어야 함에도 배움에 시간은 쉽게 허락받지 못한다. 장례식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갈림길에 선 마지막 고별식이다. 탄생이 삶에 시작인 것 처럼 죽음 또한 시작이다.

함께 했던 삶속에 아쉬운 이별의 슬픔

가족 또는 동료와의 삶에 연장선인 장례식은 살아 있을 때 섬기는 마지막 도리이며 예식이다.그래서 장례식은 지방의 관습, 사회의 통념 등 현실적인 의식이 기준이 된다. 또한 소훌히 하지 않도록 오랜 세월동안 기록과 도감 (圖鑑)으로 남겨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늘 죽음은 우리 삶과 함께하며 연장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이 깊어도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는 할 수 있어도 마음을 알지 못한다. 절실함이란 당사자가 아니면 그 순간에 감정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손이 할 수 있는 것은 수의 한벌 지어 입혀 드리는 것 외에는 할게 없다. 그래서 수의를 세제지구(歲製之具)라고도 했다. 살아서 선물로 드리는 수의(壽衣)는 무병장수 하라고 선물로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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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습(斂襲) 시에 사용할 수의는 이런 한자 뜻을 가졌다. 염습(斂襲)이란 한자 또한 시신을 거둔다는 의미로 쓰인다. 용어 하나 하나가 말해 주듯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용어를 다르게 사용됐다. 부모 자식이란 늘 희생을 요구한다.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자식을 위해 희생 할 수 있을까?

또한 희생으로 자식을 위해 헌신한 보상은 누구에게 받을 수 있을까. 삶은 보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희생과 봉사로 사는 것이다. 보상은 스스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뭍지만 자식은 부모를 산에 뭍는다는 말이 있다. 또한 살아서 잘하지, 죽은 다음에 무슨 소용이냐며 질책하는 말을 한다.

사람은 살아서 잘 할 수가 없다. 신은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늘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주변에 그 부족함을 서로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채워주고 공감 한다면 그것이 상부상조하는 정신이다, 서로를 이롭게 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가족이 되고 이웃이 되고 결국 함께 사는 사회가 된다. 사회가 결국 나라이며 국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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