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왕실 도자기 명장, 연파(蓮波) 신현철 도예가

흙으로 영롱한 보석을 빚어내다

최원진 기자 승인 2021.04.01 09:18 | 최종 수정 2021.04.01 09:23 의견 0
신현철 도예가
신현철 도예가

[포스트21 뉴스=최원진 기자] 붉은 불길이 타오르는 가마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념무상, 선미(禪味)에 빠진다. 그러다 문득, 흙에서 빚어낸 작품들이 저 가마 안에서 뜨거운 열을 견디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같은 배에서 태어나도 똑같은 자식이 없다더니, 같은 손에서 태어난 그릇인데도 똑같은 게 없다.

활활 타오르는 가마를 보고 있으면 이번엔 어떤 놈이 태어날지 자못 설렘도 온다. 산고를 이겨내고 건강하게 태어날 자식을 기다리듯, 뜨거운 열을 견디고 반듯하게 태어날 그릇을 고대한다. 선미와 설렘이 점철되는 시간, 40년이 흘러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다. 

일본식 다기 문화를 한국풍으로 바꾸며 파란을 일으키다 

한국의 대표적인 왕실 요(窯)의 고장, 경기도 광주에 터를 잡고 불교의 차(茶), 선(禪), 바랑, 전통, 창작 등을 화두로 늘 새로운 작품을 빚어 내고 있는 도예 명장, 연파 신현철 선생을 만났다. 현대적 조형미를 전통적 기법으로 풀어내는 그의 손에서 흙은 한국적이면서도 조형의 아름다움을 발하는 영롱한 보석으로 다시 태어난다.

지난해 코로나19로 모든 전시가 취소되어 지금껏 작품 활동에만 몰두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시련도 추억이 될 것이라는 신현철 선생은 붉게 타오르는 가마를 바라보며 무념무상의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선미(禪味), 참선의 오묘한 맛을 알게 하는 시간이다. 

신현철 선생은 1980년대 선방 스님들이 바랑에 커다란 일본식 다관을 들고 다니며 차를 마시는 것을 보고 바랑에 알맞은 한국적인 다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소박한 뜻을 품었으나 그의 작품은 도예가들 사이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만 해도 일본식 다기가 전부였는데,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한국풍의 다기는 많은 이들에게, 다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된 것.

1987년에 빚어낸 독특한 문양의 연잎 다기 세트는 차(茶) 전문 저널 <다담(茶談)>지 표지에 소개되는 열렬한 호응 속에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겸비했다는 호평을 받으며 일본은 물론 중국에까지 소개되었다. 그가 남긴 대표적 작품으로는 ‘연잎 다기 세트’, ‘무궁화 다기 세트’, ‘참새 다관’, ‘연지’, ‘연밥 찻상’ 등이 있다.

모든 작품에는 도공의 혼이 담겨야 하기에 완성품이 나오기까지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이 걸리기도 한다. 선생의 작품 속에는 연잎이 주로 등장하는데, 수련생 시절 봉은사 연못가에서 연잎의 아름다움에 빠진 것이 인연이 되었다. 

예술성과 기능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흙을 빚다

‘연잎 다기 세트’는 봉은사 연못의 연잎을 보면서 3년만에 완성된 작품이다. 2001년도 중국 의흥 세계 도자기대회에서 세계 정상의 작가들만 선정한 작품 782점 중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1등한 작품이다. 작설차를 마시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형상화한 ‘참새 다관’은 큰 호평을 받으며 중국 의흥의 자사호 박물관에 소장됐고. 연못에 핀 꽃이라는 뜻을 담아 만들어진 ‘연지’는 대중적인 차 행사가 열리는 곳이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연밥 찻상’은 무릎을 치게 하는 아이디어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신현철 선생은 “작은 다기 하나도 아무 의미 없이 만들지 않는다”며 “모든 작품에 예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창의성과 다기의 본분인 기능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흙을 빚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과 중국으로 도예가의 명성 떨치다

이러한 다기들은 국내를 넘어 국외에서도 찬사를 받았다. 1999년 일본 자바 현에 있는 가와 무라 기념 미술관에 도예가 최초로 초대받는 영광을 안았고, 2001년에는 중국 의흥 국제 도예전에 참가해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이후 중국의 4대 茶 박물관에 소장되는 영예를 누렸으며, 2008년에는 중국 쓰촨성에 있는 중국관에 세계 최초로 작품을 소장하며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2013년 ‘경기도 광주 왕실 도자기 명장’으로 등재됐다. 2015년 도예 공모전 및 다기 품평대회 심사위원, 대한민국 차 문화 명인 선정위원을 맡아왔고 2018년 중국 국립 다엽박물관에서 국가 1급 자격으로 개인 전시 초대전을 열어 한국 도자기의 자긍심을 떨쳤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자연사박물관까지 세계 각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에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40년 동안 도예가로 외길 인생을 걸어온 신현철 선생은 새로운 차 도구의 개발과 디자인 연구로 후배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고, 다양한 다법을 연구, 개발해 특허 및 실용신안, 의장등록 등으로 많은 다도인이 동·서양을 떠나 다양한 다법을 즐길 수 있도록 다도계 발전에 이바지해 왔다.

초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담임 선생님이 “옛날 청자에 물을 담아두면 섞지 않는다.”고 한 신기한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았다. 스무살 무렵 대구에서 열린 고미술품 전시장에서 고려 백자를 접했다. 주최 측의 배려로 입술을 갖다 댈 수 있었는데, 그렇게 부드럽고 따뜻할 수가 없었다.

그날이 도예가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되었다. 윤광조 스승으로부터 사사하고 불조에 관한 책들을 곁에 두며 분석하고 연구하고 스스로 깨쳐나가는 창조적 도예가로 걸어왔다. 이것이 지금의 그를 만들게 한 배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저작권자 ⓒ 포스트21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