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21 뉴스=강현정 기자] 이덕종 건축가는 파빌리온 건축과 차실 건축으로 많은 이들에게 설렘과 치유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국내외 차실을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하고, 이를 현대화하기 위한 자료를 꾸준히 수집하며, 차실 공간을 하나씩 실현해왔다. 또한 차실 건축의 국제화를 목표로 다양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감동을 주는 건축을 실현하기 위해 리서치와 대형 모형 작업을 전시하고, 특히, 대중과 적극적인 소통으로 건축에 담긴 의미를 전달하는 등 그의 작업은 단순한 공간 설계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전하고 있다. 본지는 이덕종 건축가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의 철학과 비전을 더욱 깊이 있게 탐구했다.
루치오 폰타나와 마크 로스코의 교훈, 기대와 현실의 차이
유년 시절 교과서에서 사진으로 접한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그림은 정말 보고 싶었던 그림 중 하나였다고 회상한 이덕종 건축가. 하지만 실제로 유럽에서 폰타나의 그림을 보았을 때 아무런 울림을 받지 못했고 무엇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스스로 당혹스러웠다고.
반면 사진으로 보았을 때 별로 관심 없게 보았던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은 보는 순간 커다란 울림을 주어 한참을 바라보았다는데. 이덕종 건축가가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에서 예상치 못한 무덤덤함을 느꼈던 것처럼, 예술은 때로는 우리가 기대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반면,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서 큰 감동을 받은 그의 경험은 예술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과 예측할 수 없는 감동을 여실히 보여준다. 기자는 이런 경험이 건축가로서 그의 철학이나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했다.
이덕종 건축가는 유년 시절부터 공간에 대한 관심이 깊어 건축학과를 다녔지만 그의 꿈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건축을 포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가 방황하던 시기에 어떤 계기로 예술에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까? “어릴 적부터 공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후 건축학과에 진학했지만, 90년대 당시 건축은 공간보다는 건설에 더 가까운 학문이었기 때문에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되었죠. 이렇게 적성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던 중, 우연히 영국 첼시 예술대학교(Chelsea Arts & Design)에 들어가 조각에 대한 흥미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조형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조각 작업의 스케일도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담임이었던 필리파 턴스틸(Philippa Tunstill) 교수는 그에게 “왜 조각 학교에서 건축을 하고 있느냐”며, 조각과 함께 건축을 다시 탐구할 것을 권유했다. 이 충고는 그가 다시 건축의 길로 돌아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덕종 건축가는 스승의 소개와 장학금 덕분에 영국의 AA School로 옮겨 학사와 석사를 졸업할 수 있었다. 영국의 AA School에서는 예술과 건축의 경계에서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학사 졸업 후, 그는 작가 안토니 말리노프스키의 조수로 일하며 대형 페인팅과 벽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석사 과정을 마친 뒤에는 존경하는 건축가 얀 카플리키가 이끄는 Future Systems에서 실무를 익혔다. 얀 카플리키는 건축가의 소명은 단순히 많은 건축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미 있고 설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덕종 건축가는 마크 로스코와 안토니 말리노프스키의 작품에서 받은 감동이 건축 공간에서도 설렘과 울림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이어졌음을 밝혔다.
지역 건축의 국제적 소통, 한국의 도전과 기회
올해로 46번째 수여되는 프리츠커상은 ‘건축의 노벨상’으로 불리며, 세계 건축계에서 주목받았다. 이 상은 인근 일본이 9번 수상한 반면, 안타깝게도 한국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을 설계한 건축가에게 수여되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건축이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을 중요시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건축이 단순한 형태적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함으로써 지역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덕종 건축가는 제주국제건축포럼 운영과 제주다운건축상 심사를 통해 로컬의 미래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
그는 지역 건축가들이 사람, 문화, 역사, 경관, 지리, 기후 등 다양한 요소가 어떻게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동시에 국제적인 무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작년 제주국제건축포럼에서는 프리츠커 수상자인 스페인 RCR 건축의 카르메 피젬, 멕시코시티의 마뉴엘 세르반테스, 일본 도쿄의 준야 이시가미 그리고 제주의 양건 건축가를 초대해 좌장을 맡았다.
이 자리에서 건축가들은 각자의 지역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지역 사회와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를 깊이 있게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소통은 지역 건축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국제적 관점에서의 통찰을 제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올해는 태국 방콕에서 챗퐁(Chatpong Chuenrudeemol) 건축가와 PAVA Architects를 방문하여 현장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이들 국제 건축가들은 태국의 지역성을 탐구하면서도 국제적으로 설득력 있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덕종 건축가는 이러한 경험은 한국 건축의 미래에 대해 여러 건축가들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한국 건축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세계 무대에서 그 목소리를 더욱 크게 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아크공간연구소, 건축의 울림 탐구하다
2020년에 건축사무실과는 별도로 설립된 아크공간연구소(ARC Spatial Research Laboratory)는 2021년부터 매년 전시를 진행하며 건축 리서치와 모형을 선보이고 있다. 첫 전시는 2021년 건축 모형을 통해 울림을 주는 건축 연구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기회였다. 이후 매년 말 전시를 목표로 꾸준히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으며, 올해 말 네 번째 전시가 개최될 예정이다. 이덕종 건축가는 영국 AA School에서 수학하던 시절 많은 건축물들을 참고하며 졸업 후 하나씩 답사에 나섰다.
그러나 사진과 화려한 다이어그램으로 보았을 때의 감동은 실제 건물을 경험하면서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경험은 그에게 ‘감동을 주는 건축’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그는 수많은 건축물을 답사하며 감동을 주는 건물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리서치는 그가 진행하는 전시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매년 초 건축물을 연구하고 모형을 제작한 뒤, 연말에는 그 결과물을 전시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덕종 건축가는 1:50 스케일로 모형을 제작해 관람자들이 건축물을 경험할 때 느끼는 감동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첫해 전시는 뮤지엄과 갤러리를, 두 번째 전시는 주택, 세 번째 전시는 종교건축을 주제로 삼았다. 올해는 파빌리온을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이덕종 건축가는 과거 100년 동안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던 12개국 24개의 파빌리온을 연구하며, 제주도의 여러 지역에 12개의 파빌리온을 제안하는 전시를 준비 중이다.
그는 파빌리온의 매력을 프로그램이 정해지지 않은 건축물에서 발견했다. 대부분의 건축물은 특정한 용도나 목적에 맞춰져 있지만, 파빌리온은 그 자체로 목적을 규정하지 않는다. 이는 파빌리온이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공간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이덕종 건축가는 설명했다.
특히 그가 주목한 서펜틴 파빌리온(Serpentine Pavilion)은 2000년부터 매년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설계한 파빌리온을 선보이는 행사다. 이덕종 건축가는 서펜틴 파빌리온에서 대중이 자연과 관계 맺고, 파빌리온으로 사람들이 연결되는 모습을 통해 파빌리온이 가진 독특한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선엽 스님과 함께하는 한국 사찰 약차의 세계화 선언
이덕종 건축가는 차실 공간을 단순한 휴식처 이상의 명상과 치유의 공간으로 바라보고, 이를 기반해 한국의 건축을 국제적으로 알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는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차실의 원류를 연구하며, 국제화를 위한 디자인 작업에 매진해왔다.
몇 년 전, 이덕종 건축가는 조선시대 차실의 원형으로 알려진 대흥사 일지암에서 더 깊은 감흥을 얻기 위해, 일지암의 법인 스님으로부터 공간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특히 법인 스님은 중국 건축 전문가들이 일지암을 세밀하게 실측하며 차실 재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들은 중국 내 차실 테마파크를 만들며 한국, 중국, 일본의 차실을 1:1 비율로 재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선엽 스님은 일본과 중국의 차실공간 세계화에 안타까워 하며한국의 차실 유닛을 제작해 수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이덕종 건축가는 현재 이 프로젝트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한국의 수제 약차 명인이자 한방차의 창시자인 마음정원 선엽 스님을 만나 한국 차와 차실의 대중화를 함께 고민하게 되었다. 선엽 스님은 한국의 한방차를 중국과 유럽에 수출하면서, 한국의 차실 공간 역시 함께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이에 이덕종 건축가는 차와 차실을 함께 수출하며, 한국의 전통 건축과 차 문화를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차 문화가 곡주의 대중화로 인해 절에서만 유지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여, 이덕종 건축가는 ‘템플 티 하우스(Temple Tea House)’라는 상호로 한국의 차와 건축 공간을 세계에 널리 알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또한 인스턴트 차로 인해 잃어버린 한국 전통 차의 맛을 되살리고, 다실에 깃든 차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덕종 건축가는 선엽 스님과 함께 한국 차와 다실의 대중화를 꿈꾸며, 차실의 정신을 건축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작업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고자 한다. 그 첫 번째 프로젝트로 대성리 MT촌 입구에 차실 공간과 설계 사무실을 설립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곳을 통해 한국의 전통 차와 차실 문화 그리고 티퍼포먼스까지 널리 알리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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