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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례 -
김청주와 김서울은 새벽 2시쯤 대학교 어플 익명게시판에서 A가 올린 ‘산책할래요’라는 글을 보았다. 김청주와 김서울은 A와 연락하였고 집까지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학교 안에서 A를 만났다. A는 이미 1차례 술자리에서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5잔 정도 마신 상태였다.
A는 대학교 후문에 도착하자 자신의 집으로 가서 술을 한잔 더 하자고 제안했고, 김청주와 A는 편의점에서 과자와 소주, 맥주를 구입했고 A가 자신의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였다. A가 혼자 사는 원룸 안에서, 김청주와 김서울, A는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A는 전날 남자친구와 헤어졌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사준 비싼 옷을 입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청주와 김서울, A는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각각 2~3잔 마셨다.
김청주와 김서울, A는 한 침대에 누웠고, 김서울이 자는 사이 김청주와 A가 바닥에 내려가 성관계를 가졌다. 이어, 김청주가 바닥에서 자는 사이, 김서울이 A를 침대 위로 올려 성관계를 가졌다. A는 다음 날 김청주와 김서울을 준강간으로 고소했다.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과 “알코올 블랙아웃(Black Out)”의 차이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통해 피해자를 간음하는 범죄이다. 준강간은 만취 등으로 몸을 못 가누거나 의식을 잃은 상태를 이용해서 피해자를 간음하는 범죄이다. 강간죄는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범죄인 반면에, 준강간은 이미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폭행이나 협박을 하지 않았어도 성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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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강간죄에서 ‘심신상실’이란 정신기능의 장애로 성적 행위에 대한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항거불능’이란 심리적,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를 말한다.
피해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술, 약물 등에 의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 또는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더라도 정상적인 판단 능력과 대응·조절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라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에 해당한다(대법원 2021. 2. 4. 선고 2018도9781 판결 등).
반면에 ‘알코올 블랙아웃’은 알코올 성분이 외부 자극에 대하여 기록하고 해석하는 인코딩 과정(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뇌의 특정기능)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행위자가 일정한 시점에 진행되었던 사실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의식상실과 구별되는 것으로, 피해자가 음주후 준강간을 당하였음을 호소하는 경우 알코올 블랙아웃 상태였다면 피해자는 기억장애 외에 인지기능이나 의식 상태의 장애에 이르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대법원 2021. 2. 4. 선고 2018도9781 판결).
인지장애 수반하지 않는 단순한 기억장애라면 무죄
술을 많이 마셨을 때 2가지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먼저, 잠을 자는 상태이거나 완전히 몸을 가눌 수 없고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어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인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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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당시에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대화를 이어나가지만 다음 날 기억만 못하는, “필름이 끊기는” 경우이다. 준강간에서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은 인지장애로서 전자를 의미한다. 만일 기억장애만 있는 알코올 블랙아웃이라면 준강간으로 보기에 부족하다. 김청주와 김서울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두 명이 성관계를 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편의점에서와 원룸 안에서 A는 멀쩡해 보였고 술마시고 분위기에 따라 성관계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성범죄로 고소당하면 풀어내기가 어렵지만, 성관계 당시 A가 후자의 상태였다는 점을 입증해 낼 수 있다면 가능하다.
대학에서 원룸에 가기까지 A의 걸음걸이나 말투 등을 확인할 수 있는 편의점 CCTV 등 객관적인 증거들을 확보하고, A가 평소의 필름이 끊기지만 남들이 보기에 취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음주습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A나 A의 지인의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면 수사, 재판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당사자 사이 관계, 전후 정황도 심신상실 등 판단에 중요
한편, 피해사실 전후의 객관적 정황상 피해자가 심신상실 등이 의심될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었음이 밝혀진 경우 혹은 피해자와 피고인의 관계 등에 비추어 피해자가 정상적인 상태하에서라면 피고인과 성적 관계를 맺거나 이에 수동적으로나마 동의하리라고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인정되는데도, 피해자의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피해자가 단순히 ‘알코올 블랙아웃’에 해당하여 심신상실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대법원 2021. 2. 4. 선고 2018도9781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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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도9781판결의 사실관계를 보면, 28세인 피고인(남성)은 18세인 피해자(여성)와 일면식이 없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1~2분간 얘기하다 모텔에 데리고 갔고, 피해자는 걸을 때 휘청이는 모습이 CCTV에 담겨 있으며, 피해자와 함께 술을 마시던 그의 남자친구가 피해자가 사라졌다고 경찰에 신고한 상태였고, 경찰이 객실 인터폰을 통해 피고인과 통화할 때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대법원은 서로의 관계나 정황상 심신상실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다. 위 사례에서도 같은 방에서 2명의 남성과 순차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A가 심신상실 상태였다고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성관념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고, 남자친구와 헤어져 이성(異性)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상황이었다면 비정상적인 경우로 보기도 어렵다. 위 사례에서 피고인들에 대하여 1심에서는 유죄판결이, 항소심에서는 무죄판결이 내려졌고 검사의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무죄판결이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