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례(喪葬禮)의 ‘상중제의(喪中祭儀)’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인과(因果)의 도리로서 떠나감의 아쉬움과 황망함, 그리고 헤어짐의 설움을 표현하며 애도하는 의식이다. 장례가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현실 세계의 단 한번의 마지막 의식이며 죽음이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혼(魂)을 위로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생명을 잃은 육신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 따라서 장례란, 이제 미련을 버리고 편히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지막 길의 의례이며 예의(禮儀)이다. 가족이 슬퍼하는 것은 고인의 존재가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잊을 수 없는 감사이자 사랑이며, 눈물 속의 이별은 곧 ‘슬퍼함의 도리’인 것이다. 장례는 현실 세계에서 인과의 단절과 아쉬움을 예(禮)로써 행하는 인간의 도리이며, 그 자체로 삶의 마지막 예절이다.
미신과 신앙 그리고 인간의 한계
미신은 현실이 아니며, 이성적으로 규명할 수 없다. 미신이란 불확실한 기원을 가진 믿음이며, 신앙 또한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불가사의한 권능이다. 부족한 인간이 신의 권위를 침범하려 드는 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잊은 행위이다. 학자 집안에서 ‘사자밥’을 차리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자밥은 미지의 신적 존재의 권위를 인정하는 샤머니즘의 산물로서, 본래 상례의 도리와는 다르다.
현실 예절의 본질
현실의 예절이란 상호 간의 관계를 인정하고, 평등함 속에서 치우침 없는 배려로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즉, 행위를 통하여 현실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장례식의 절차 또한 그러하다. ‘설영좌(設靈座)’라 하여 영좌를 설치하는 것은 생명을 담았던 육신을 떠난 영혼이 머물 수 있도록 그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육신은 물질의 산물이기에 물질의 세계로 돌아가고, 시신을 염습(殮襲)하는 것은 정리하고 보내는 의례이다. 시신에 따른 특별한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은 시신에는 이미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영혼은 생명과 함께 존재한다.
‘영(靈)’은 원형의 생명을, ‘혼(魂)’은 현실 속 생명의 형상을 뜻한다. 혼이 없는 육신은 생명의 가치를 잃은 것이며, 순리의 법리에 따라 정리하고 거두는 것이 합당하다. 모든 의식은 영혼의 자리에서 혼을 위한 예(禮)로 이루어져 있다.
제사와 장례의 구분
일반적으로 장례 중 제사의식을 함께 행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크나큰 잘못이다. 제사는 조상을 섬기고 덕을 기리는 의식이며 예(禮)이다, 시신을 처리한 이후에 행하는 의례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례는 ‘축(祝)’이 없는 단잔(單奠)의 고유 의식이며, 제사는 ‘삼헌(三獻)’과 ‘축문(祝文)’을 갖춘 제례 의식이다.
올바른 전통 이해와 전문가의 도리
시대가 변하면서 허례허식을 없애자고 하면서도, 정작 전통 의례의 구분조차 바로 알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문화에 대한 무지이자, 예(禮)의 근본을 잃은 것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인의(仁義)의 도리를 규명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들의 뜻을 되새긴다면, 오늘날과 같은 혼란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라 하면서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면, 그 전문성은 아무 의미가 없다. 바른 도리를 알고, 바른 예를 실천함으로써 인정받는 것이 진정한 전문가의 자세이다. 모른다는 이유로 진실을 외면하는 전문가는 결국 유족을 기만하고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성하고 또 각성하여, 바른 도리로 이별을 인도하고 돕는 것 그것이 바로 전문가의 도리이다. 살아 있는 사람조차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죽은 이를 제대로 섬길 수 있겠는가. 산자의 도리와 죽은 자의 도리는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