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애감자’ 박성돈 대표, “끝 없는 도전은 현재도 진행형”

자랑스런 해병 출신의 라이프 스토리 화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열정과 집념의 길’

구원진 기자 승인 2023.05.08 07:29 | 최종 수정 2023.05.08 07:31 의견 0
메밀애감자 박성돈 대표

[포스트21 뉴스=구원진 기자] 끝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 위로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며 떠오른다. 중천의 해는 거북이만큼이나 느리게 움직이는데,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는 눈 깜짝할 새 솟아오른다. 그래서 보는 맛이 다른 걸까? 일출을 보겠다는 사람은 있어도 중천에 뜬 해를 보러 가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안보면 아쉬울 만큼 어딘가 특별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기고, 관심이 가고, 자꾸만 쳐다보고 뒤돌아 보게 된다. 일출 같은 사람. 서서히 어둠을 밝히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그런 사람, 그래서 그들은 늘 주목받는다. 아침 해를 가장 먼저 바라보는 강원도 강릉시에 일출(日出) 같은 남자가 있다. 늘 새로운 시작으로 주목받으며 ‘태양’이라는 별명이 붙은 남자, 강릉의 ‘갈레트’ 맛집으로 최근 화제가 된 ‘메밀애감자’ 박성돈 대표다.

강릉의 핫플레이스

강릉시 연곡면에 자리한 ‘메밀애감자’는 눈에 띄는 특별한 외관을 하고 있지 않아 모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가게다. 아는 사람만 알고, 주말에는 긴 대기 줄로 “저기가 뭐꼬?” 하면서 알게 되는 그런 맛집이다. 간판만 보면 메밀·감자전이라도 굽는 곳인가 싶은데, 이곳은 프랑스 식문화와 한국의 식재료가 하모니를 이룬 퓨전요리 전문점이다. 바삭바삭한 메밀로 만든 프랑스식 갈레트에 강원도에서 나는 특산품이 토핑된다.

메밀애감자 메뉴

건강하고 맛도 좋은 갈레트 전문점인데, 시그니쳐 메뉴는 또 ‘메밀감자치즈 쉐이크’다. 맛을 찾아온 이들은 “맛을 상상할 수 없어서 먹어보러 왔노라”고 입을 모은다. 먹어보지 못한 맛에서 사람들은 호기심과 관심을 가진다. 먹어본 사람들이 엄지를 치켜세우면, 너도나도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온다. 핫플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이런 요리를 만들어내고 전문점을 차릴 정도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게 된다. ‘사장님이 전문가다’, ‘요리 연구가다’, ‘주방장이 유명한 레스토랑 혹은 호텔 출신의 셰프일 것이다’ 등등의 상상을 한다. 그러나 박 대표는 이와는 전혀 무관한 여행사 사업가였다.

예술을 담아내는 요리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너도나도 힘들었지만,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업종은 누가 뭐래도 여행사였다. 공항의 활주로가 셧다운 되며 80%가 넘는 기장과 스튜어디스들이 옷을 벗었다. 그러니 여행사는 말도 못 했다. 박 대표는 생활고를 덜기 위해 다른 일을 알아봐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강원도의 건강한 특산품인 메밀과 감자 그리고 해산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강을 중요시하는 현대인들에게 맛있고 건강한 요리를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에서 강릉 스타일의 새로운 갈레트가 탄생했다. 여행사에서 요식업으로 전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타고난 예술적 재능’에 당시 ‘강원도 탐구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어서였다.

캐나다 유학시절

요식과 예술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요리를 잘하려면 기본적으로 예술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되는 감각적인 요리는 마지막 플레이팅까지 하나의 예술을 담아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박 대표는 어릴 적부터 미술에 소질이 뛰어났지만, 미대는 커녕 공부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에서 자랐다.

공고를 갔고 이후 철이 들고서는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판단에 무작정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 아니 남들은 유학이었지만 박 대표는 취업비자로 일하며 공부해야 했다. 당시 캐나다 ESS스쿨에서 마케팅 업무를 맡아 유학 오는 학생들을 상담했다. 유학생들은 오로지 공부를 위해 왔지만, 박 대표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더 절실하고 더 간절한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어학원에서 배운 스킬을 한국에 가져와 학원을 차려볼까 했는데, 고등학교 졸업자는 학원을 설립할 수도, 강사가 될 수도 없다는 매정한 법의 잣대에 마음을 접어야 했다. 개인과외로 전향하고, 영어 공부법을 알려주는 강연에 나서다 서른 즈음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된다. 어릴 적부터 품어왔던 예술의 꿈이 조금씩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영어 강연

지나고 나면 다 오늘을 위한 것

미술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형언할 수 없는 사진을 보며 몸속 어딘가 깊은 곳에서 예술적 감각이 꿈틀꿈틀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태국으로 건너가 사진을 배우고 전시회도 하면서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했다. 예술 사진으로 밥벌이를 할 수 없었기에 여행사에 소속된 사진사로 일했다.

사진사 시절

캐나다에서 익힌 영어 실력 덕분에 프리토킹이 가능하다 보니 여행객들과의 소통도 원활했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어주면 장당 5,000원에 판매가 됐는데, 제법 용돈이 됐다. 돈도 돈이지만 퀄리티가 좋은 사진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고, 한 장이라도 예술성을 담고자 하는 마음으로 찍다 보니 소속 사진사 중 가장 수입이 좋은 사진사가 되었다.

이후 사진사로 완전히 업을 전향해 웨딩 전문 사진사로 일하며 예비부부들의 사랑을 감각적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그때는 돈보다도 하고 싶은 일이 먼저였다. 돈은 그저 일한 만큼 따라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가정을 꾸리게 되자 돈이 더 필요했다. 하고 싶은 것보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더 절실해졌다.

스타트업으로 10억 매출 달성

2013년, 한국으로 넘어와 수중에 가지고 있던 돈 350만 원으로 1인 스타트업 ‘여행사’를 시작했다. 사진을 전공했기에 ‘사진을 무료로 찍어주는 자유투어’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프리스타일 투어가 도입된 것은 이때가 처음일 것이다. 여행사로 가장 호황을 누렸을 때는 매출 10억 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여행사부터 메밀애감자까지 성공 신화에 대해 박 대표는 “첫째는 운이 좋았고, 둘째는 남들이 하지 않았던 것,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것이 성공의 어머니였다”고 말했다. 즉 성공하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길을 뚫는 오리진(Origin)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기자는 좀 달리 봤다. 그에게 오리진이 성공의 길은 맞지만, 성공의 열쇠는 ‘살아있는 도전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병대 시절 양로원 봉사

공고를 졸업하고 귀신 잡는 해병대에 입대한 것부터 홀로 취업비자로 유학길에 오른 것 하며, 독하게 영어를 파고, 영어 선생을 하고, 현지에서 옷가게를 열고, 350만 원으로 1인 스타트업을 시작한 것 모두가 과감한 도전이었다. 요리에 ‘요’자도 모르는 남자가 건강한 갈레트 요리를 만들어 강릉을 핫플레이스로 만든 것도 대단한 도전이고 업적이다.

자기 계발에 눈을 뜨다

그에게 좀 더 어릴 적 이야기를 들으니 혀를 내두를 에피소드가 가득했다. 자전거를 타고 안양에서 대전까지 180km를 왕복하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그리고 제주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인천을 경유해 안양으로 돌아왔다.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세상과 부딪히고 극복하고 이겨내는 여행이었다.

과히 해병대에 들어갈 만한 체력과 용맹함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해병대에 입대한 것도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감도 충만했다. 가정환경이 어려워 공부는 못했지만, 책을 가까이했다. 초소에 근무하다 누가 두고 간 ‘카네기 리더십’으로 데일 카네기를 알게 됐고 ‘자기관리론’까지 읽으며 자기 계발에 눈을 떴다.

1인 시위

그리고 더 많은 책을 읽었다. 박 대표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쉬운 길은 없었다. 끊임없이 도전하며 살아왔다. 다시 시도하고. 또다시 시도하고 했던 그 경험들이 내공을 쌓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소회했다.

박 대표에게는 또 다른 꿈이 있다. 언젠가 경제적 자유가 생기면 비영리 교육단체를 설립해 많은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을 전달하는 것이다. 어릴 적 어려웠던 시간이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동기가 되었을까? 그는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스무 살 때 봉사활동을 하면서 생겼다.”고 했다.

“군대에서 병장으로 있을 때 한 달 정도 양로원에서 봉사한 적이 있는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며 “봉사는 나눔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어서 꾸준히 하고자 한다.”고 했다. 지금도 지역사회 봉사 단체인 ‘작은샘터’에서 홍보과장으로 일하며 독거노인을 돕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스칼렛의 마지막 대사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언제나 삶을 개척하고 도전해 온 박 대표의 마지막 꿈과 포부가 또다시 멋지게 떠오를 수 있기를, 망망대해 위로 떠 오를 내일의 붉은 일출을 다시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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