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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 동의는 받았지만, 성행위를 결심하게 된 중요한 동기에 대해 속인 경우 위계간음죄가 성립할까"

-사례-

36세 남성 A는 채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14세 소녀 B를 알게 되었다. A는 처음부터 자신을 ‘고등학교 2학년 학생 C’라고 속여 신뢰를 쌓았고, 두 사람은 오프라인 대면 없이 메시지와 통화로 온라인상 교제를 이어갔다. 이후 A는 “나(C)를 스토킹하는 여성이 있는데, 나에게 집착을 해서 너무 힘들다. 죽고 싶다. 우리 그냥 헤어질까”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스토킹하는 여성을 떼어내려면 나의 선배(A)와 성관계하면 된다.”고 말했다. B는 그 말을 믿고 C와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실제 ‘선배’는 A였다. A는 B를 만나 ‘C의 선배’로 행세하며 B와 성관계를 가졌다.

위계간음죄의 의미 및 사건의 쟁점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7조 제5항은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아동·청소년을 간음하거나 아동·청소년을 추행한 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강간죄는 저항할 수 없는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을 통해 간음으로 나아간 경우를 처벌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위계간음죄는 폭행이나 협박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아동·청소년인 피해자로 하여금 오인·착각·부지를 불러 일으키는 속임수(위계)를 이용해 성관계를 하면 처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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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건의 핵심은 바로 이 ‘위계’의 인정 범위였다. A는 B에게 폭행이나 협박을 한 적이 없다. 다만, 허위의 상황과 인물을 꾸며내 B에게 성관계에 이르게 된 중요한 또는 결정적인 ‘동기’에 대해 오인·착각·부지를 일으켰다. A를 처벌해야 할까?

과거 대법원 판례 : 성행위에 부가된 조건·동기 등을 기망하여 착각을 일으킨 경우에는 위계로 보지 않았음.

과거 대법원은 ‘성행위 자체에 대한 인식의 착오’만 위계로 인정했다. 미성년자나 정신장애자가 성관계의 의미 자체를 모르는 경우, 예컨대 ‘재미있는 놀이’라고 속여 성관계했다면 성행위 자체에 대한 위계로서 처벌된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실제로 처벌사례가 거의 없다.

과거 판결의 사실관계를 살펴보면, 피고인은 미성년자인 피해자에게 “성관계를 맺으면 돈을 주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피해자는 금전적 약속을 믿고 피고인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이후 돈을 받지 못하자 위계간음죄로 고소했으나 무죄 판결이 선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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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오인, 착각, 부지란 간음행위 자체에 대한 오인·착각·부지를 말하는 것이지, 간음행위와 불가분적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 다른 조건에 관한 오인·착각·부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피해자의 동기가 단순히 ‘돈을 받기 위한 기대’에 그친 경우에는 위계간음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았다(대법원 2001. 12. 24. 선고 2001도5074 판결).

성매매나 ‘조건 만남’을 하기로 하고 돈을 주지 않은 경우에는 ‘이유나 대가’를 속인 것일 뿐, 성행위 자체의 착각이 아니라는 이유로 위계간음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변경된 대법원 판례전원합의체 : 성관계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동기를 기망하여 착각을 일으킨 경우에도 처벌.

그런데 최근 대법원은 기존 입장을 전향적으로 바꾸었다. ‘성행위 자체’를 속인 경우뿐 아니라 성행위에 이르게 된 중요한 또는 결정적인 이유나 대가를 거짓으로 꾸며 상대방의 판단을 흐리게 한 경우에도 위계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성행위를 결심하게 된 중요한 동기를 기망하여 착각을 일으킨 경우 ‘성적인 자기 결정권’이 침해된 것이고, 아동ㆍ청소년 등 취약계층의 시각에서 법을 해석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고 피해자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의 목적을 달성했다면 위계와 간음행위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고, 따라서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성립한다.”, “피해자가 오인, 착각, 부지에 빠지게 되는 대상은 간음행위 자체일 수도 있고, 간음행위에 이르게 된 동기이거나 간음행위와 결부된 금전적·비금전적 대가와 같은 요소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대법원 2020. 8. 27. 선고 2015도9436 전원합의체 판결).

또한 “행위자의 위계적 언동이 존재하였다는 사정만으로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므로 위계적 언동의 내용 중에 피해자가 성행위를 결심하게 된 중요한 동기를 이룰 만한 사정이 포함되어 있어 피해자의 자발적인 성적 자기 결정권의 행사가 없었다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인과관계를 판단할 때에는 피해자의 연령 및 행위자와의 관계,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 범행 당시와 전후의 상황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고 보았다(대법원 2020. 8. 27. 선고 2015도9436 전원합의체 판결).

변경된 대법원 판례가 가지는 의의

이번 판결의 취지는 아동·청소년, 미성년자, 심신미약자, 피보호자·피감독자, 장애인 등 취약계층의 성적 자기결정 능력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방으로부터 기망행위를 당하거나 심리적인 지배관계 속에서 이용당하지 않도록 ‘위계’의 해석 범위를 넓힌 것이다.

위 사건은 36세 성인이 14세 미성년자에게 ‘고등학생’을 가장하고 온라인 친분 관계를 맺은 뒤, 첫 대면 자리에서 ‘선배’로 행세하며 성관계를 맺은 경우다. 대법원은 이를 피해자의 현실적 판단능력이 왜곡된 상황으로 보고, 그 의사결정이 자유롭지 못했고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하여 성관계를 가진 행위를 범죄로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