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햇살과 함께 봄이면 수많은 꽃들이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진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대지의 향기를 가득 담고 우아한 목련이 환한 등불을 켜고 내 마음을 비춰준다.
아파트 앞 화단에 봄내음 가득 할 때면 아직도 선명한 여고시절 기억의 한 자락. 교정에 만발한 새하얀 목련은 소녀들에게 봄의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에너지와 날실과 씨실의 거침없는 수많은 조형언어로 다양한 빛깔의 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학교 옆 건물 옥상 위 수많은 하얗고 긴 국수자락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며 춤을 추고, 씨앗 파는 할아버지를 그리던 미술선생님. 세느강이라 부르던 강 건너편 학교에서 모스부호처럼 보내오던 반사된 거울의 빛, 회색빛 건물들 가득한 곳에 희망처럼 우뚝 서있는 커다란 목련 한그루···
방송에는 연일 전 세계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소리 없는 전쟁으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담은 불행한 소식이 날마다 숫자화 되어 눈과 귀를 자극하며 일상을 무기력하게 한다. 파시즘에 저항한 <게르니카>로 유명한 피카소는 화가지만 시인이기도 하다.
그림을 통해 입체주의의 새로운 조형언어뿐만 아니라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탄생하게 된 죽은 누이와 친구 카사게마스의 죽음 그리고 가족과 연인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슬픔, 고뇌 그리고 잔혹한 전쟁에 대한 고발 등 인류애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기에는 매우 난해한 시를 썼다. 본격적인 시는 1935년부터 시작해 1959년까지 쓴 시가 현재 남아 있다. 350여 편의 시와 3편의 희극을 남겼는데 아내 올가와 이별할 무렵 많은 시를 썼다.
‘끝과 끝을 맞추어 선 슬픔으로’로 시작해서 ‘고요도 시간도 모든 욕망들도 찌꺼기들도 모든 잎들의 떨림의 빛들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로 끝나는 피카소의 <1937년 10월 28일>이라는 긴 시가 생각난다.
피카소는 그림에만 몰두하기에는 그의 천재 예술가로서의 탁월한 역량과 내적인 에너지가 넘쳐났다. 피카소의 시의 구절들이 절절하게 투영되어 느껴지는 요즘이다. 속도와 정지를 모르고 평행선으로 달리고 있는 비극적 슬픔은 언제쯤 끝이 날까?
우울함 가운데에도 내가 좋아하는 글 중에 땅을 팔라는 미국의 피어스대통령에게 보낸 시애틀이라는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 속 구절들이 가끔 생각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팔수 있겠는가?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기억 속에 있는 이 땅의 모든 거룩한 것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온갖 벌레들의 맑은 노래 소리,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사랑하듯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온 마음을 다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임을 알라. 추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혼자서는 살수 없는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한 형제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삶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삶을 살 때는 삶의 전부를 오롯이 드러내고 죽을 때는 죽음을 오롯이 드러낸다.
삶과 죽음은 따로가 아니고 하나이다. 죽음은 모든 삶을 떠받치고 있는 원리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고 삶의 마침표이자 인생의 졸업시험이다. 죽음은 성숙의 결론이다.
사람은 그의 죽음을 보면 그의 삶을 알 수 있다. 인생을 열심히 산 사람은 미련 없이 떠난다. 인생을 허송세월한 사람은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잘 익은 과일은 꼭지가 잘 떨어진다.
둥근 보름달도 하루 밤이면 이지러지고 그 찬란하게 아름답던 목련도, 동백도, 붉은 단풍도 미련 없이 툭툭 떨어져 소리 없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안타깝지만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신의 뜻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자연적 질서의 ‘죽음’과 사회적 제도적 ‘죽임’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무속인들은 죽임만 굿을 한다. 이제 우리는 죽임 없는 세상을 만들어 평화로운 살림의 세상을 만들어 가야한다.
사려 깊은 통찰력과 분별심으로 지역, 민족, 인류공동체의 배려와 집단적 지성을 발휘해서 물리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위기를 잘 극복해서 하루빨리 이 깊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와 일상적 삶의 리듬을 회복해야 한다.
바이러스 감염병, 굶주림, 핵전쟁이나 테러, 기후온난화 문제가 해결되어 자연의 질서를 회복하기를 바래본다. 실존적 위기와 시련 속에서 나를 돌아보며 ‘고유한 나’로 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충만함을 유지하며 산의 마음처럼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만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만 페스트로 쓰러지고 말았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대의 가족과도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부드럽게 이별하라. 자연은 배우를 썼다가 다시 무대 밖으로 나가게 하는 연출자와 다르지 않다.
자연(우주적 이성)이 그들을 그대와 결합시켰듯이 이제 자연이 다시 그대를 그들과 떼어 놓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일 따름이다. 인생은 3막 만으로, 완전한 드라마로 끝날 수도 있다. 죽음의 신이 다가오면 아직 5막이 끝나지 않았다고 대답할 것 인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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